| 을지디멘션: 기술된 기억, 그리고 감각의 번역


- 안성은

 


디지털이 구축한 데이터 스케이프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스마트’한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인터페이
스는 인간과 물리적 거리를 좁혀가며 ‘자연스러워져’ 간다. 인간-기계 인터페이스가 신체의 연장으
로 기능하며 감각을 재편하는 시대. 기술은 기억을 어디까지 재현할 수 있을까? 이때 감각은 어
떠한 번역과정을 거치게 될까?
박동준의 <을지디멘션>은 을지로 3, 4가 사이에 위치한 세운청계상가 건물 안 3층 전시장 공간극
으로 향하는 여러 이동 경로에서의 수집물(오브제, 사운드, 풍경, 그리고 감지되는 분위기)을 조사
하여 가상의 공간으로 재구성한 VR(Virtual Reality) 작업이다. 작업의 배경이 된 을지로는 근현대
산업기술과정과 그 연대기가 압축·집약된 공간이자 도시재생 관련 이슈로 인해 변화와 잦은 유입
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과거 유행한 통신, 전기·전자, 음향 기기부터 쓰
임새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설비, 시스템, 부품들 그리고 간간히 섞여 있는 스튜디오, 카페 등
과 거래가 활발한 목공, 철재와 같은 자재파트가 뒤섞여 익숙하고 낯선 풍경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을지로를 오가며 발굴된 수집물은 반복적 인지를 통해 저장된 기억들로, 서로 미끄러지고
겹치길 반복하며 여러 시대가 겹진 기억의 방을 이룬다. 이렇듯 <을지디멘션>에서 직조된 가상공
간은 기억을 매개로 한 감각적 전이 지대로, 그 자체가 을지로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되길 자처
한다.
VR기기를 착용한 관객은 손에 쥔 컨트롤러를 이용하여 가상의 공간을 탐색한다. 컨트롤러는 공간
을 이동하게 하는 트리거이자, 공간에 놓여있는 평면과 입체로 구현된 을지로의 면면을 당겨오고,
비틀어 보고, 확대하여 살펴보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감촉성을 촉발한다. 사진으로 기록된 장면
이 공간 내에서 입체적으로 구조화되면서 일부 공간은 잘린 단면으로 관객을 마주하기도 한다.
기억 내 다른 구도의 기억들을 들추는 이 작업은 인지되지 못한 장면들을 관객의 것으로 재-기억
화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한다. 다시 말해 관객은 작가가 재구성한 복도를 지날 때마다, 곳곳에 놓
인 세운청계상가 내 풍경들을 지나며 전시장으로 오기까지 자신이 스쳐온 공간들을 재인식하여
기억해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평평한 기억이 입체적으로 끌어올려 지는 순간인 셈이다. 이윽
고 복도의 끝에 도달하면 진공상태에 놓여있는 듯한 전시장을 만나게 된다. 전시장으로의 입장은
또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연결되며, 무중력 상태에 놓여 비행하고 있는 기억 저변의 사물들을 목
격할 수 있다. 전시장 밖 공간이 기억·풍경의 짜임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공간에서는 부유하는 기
억의 산물들을 느슨하게 방목한다. 여기서 어떤 대상을 건져 올릴 것인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이
다.
<을지디멘션>에서 기억의 공간과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접촉은 액션을 통해 필연적
으로 관객을 접촉 대상과 만나게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동의 경험이 될 수 있는 풍경들은 작가가 재구성한 공간 내에서 이를 경험하는 인
터페이스의 사용 방식을 통해 개인의 감각을 증폭시킨다. 사용자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연동시키

는 컨트롤러는 관객에게 능동적인 움직임을 부여하며, 행동하는 주체로 작업에 등장시킴으로써
개별 관객을 호명하며 을지로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시도한다. 이처럼 인간-기술 인터페이스의 매
끄러운 결합은 사용자로 하여금 더욱 확장적으로 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존재로 발현시킨다. 신
체적 감각과 공간과의 관계 맺기가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감각은 새롭게 인식·전환되고 길들
여지며, 동시에 확장된다.
개인적 기억과 타자의 기억, 나아가 사회적 기억의 경계지점을 포착하고자 시도한 이 작업은 현
재 우리가 감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미끄러운 기억들 속에서 기억을 구조화하는 시도
는 공감각적 지각 활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 과정에서 감각되는 것들은 이전에 체감하지
못한 방식으로 감각의 지형을 확장시키며 점점 더 우리 안으로, 들어선다. 언어화되기도 전에 감
각의 번역을 통해 체화되는 것들. 디지털화된-비물질적 기억의 장면들이 더욱 강한 물질성을 획득
하는 <을지디멘션>은 동시대 우리가 체감하는 공통의 감각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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